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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ANGE

나의 아르바이트 역사

루시-조깅. 가사가 참 예쁘고 좋아요!

 

2017년 5월, 학교에 어느정도 적응해가는 신입생이었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중간중간에 알바를 하지 않았던 한두달을 제하고는) 23살 여름까지 각종 아르바이트를 했다.
마지막 아르바이트로 실업급여를 받으며 23살 겨울을 보냈고, 24살 봄은 정말 다행히도 근로장학에 뽑혀 꿀을 빨고있다.
실업급여를 받은 반년을 제외하면 소일이라도 계속 하고 있는 것.. 이 조금 슬프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니.

사실 근로장학에 뽑히기 전(뽑힐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항상 지원해왔지만 붙는 확률은 1/4 될까말까 였으니.)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곳에 이력서를 써 면접을 보러 다녔다. 많은 경력 덕분인지 피잣집 아르바이트에 붙어 하루 정도 일을 했는데, 하필 그 날, 첫 출근 날 퇴근 전에 근로 연락이 와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요새 뉴스레터나 다른 분들의 블로그를 보면, 기록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앞서 말한 이력서를 쓸 때마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겨우겨우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으니..
이참에 블로그에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017 : 설빙, 소리문화의전당 내 카페

첫 아르바이트는 기숙사에서 자전거를 타고 15분 정도 페달을 밟으면 도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설빙이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첫 알바를 시작한 5월은 더워지기 시작하는 무렵, 즉 설빙 성수기다..

거리가 꽤 됐는데도 평일(주5일) 마감타임을 했다. 첫 알바인 만큼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에 거의 매일 퇴근하면 녹초가 되어 있던 걸로 기억한다.
(내 1학년 학점이 조져진 건 설빙 때문이라고 변명해본다..)
방학때는 고정적이던 스케쥴이 유동적으로 바뀌면서 주말에 출근을 하거나 풀타임을 뛰기도 했다. 상태가 안 좋은 과일이나 손질하다 망가진 것들을 빙수나 음료수에 넣어 만들어 먹던 것이 즐거웠다. 주문이 밀려들어와 정신이 혼미해 질 때면 높은 확률로 실수를 하는 바람에 매니저님에게 혼나는 일이 부지기수였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날이 선선해지면 분명 손님이 줄어들 테니 겨울까지 꿀을 빨아야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7월의 어느날 자전거를 타고 가던 출근길에 자동차와 부딪혔기 때문이다. 전치 2주라는 다소 가벼운 부상이었으나 이를 매니저님에게 알렸더니 곧바로 해고통보를 받았다.
^^… 겨울 즈음에 생각나서 방문해 보니, 그 때 있던 아르바이트들 절반은 자진해서 그만두거나 짤렸다고 하더라. 전체 인원 자체가 여름의 반도 되지 않는 걸 보니 허탈했다.

홀 파트였어서 커피를 내리고 음료수를 만들고 계산을 하고 테이블을 닦는 일이 전부였지만, 사실 이 덕분에 추후의 카페알바들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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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기숙사 근처에는 소리문화의 전당이라는 공연장이 있다. 이 곳에 안에 위치한 카페에 당시 동기이자 친했던 친구와 같이 지원을 했고 붙어 일을 하게 되었다.
카페 자체가 공연장 ‘안’에 있다 보니 공연이 있는 날만 출근을 했다. 물론 이마저도 주말에는 거의 출근하지 않았으니 사실상 일을 하는 시간도, 버는 돈의 양도 절대적으로 적었다. 출근을 한다 해도 알바생 둘이서 30잔 가까이 음료를 만들면 하루가 끝날 정도로 매우 여유로웠다.

돈을 모을 수 있을 정도로 번 게 아니기에, 설빙 알바를 하면서 모았던 돈과 교통사고 합의금을 보태 조금씩 썼던 걸로 기억한다.

30대 중반의 남성인 매니저님이 동기한테 호감을 표시하던 게 황당했지만, 그 분 덕분에 ‘안녕하신가영’, ‘짙은’을 알게 되어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하다.


2018 : 개인카페, 영어학원 보조강사, 베이비시터


그래도 카페알바 좀 해봤다고, 학교 앞의 개인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라떼아트는 못할지라도 스팀, 샷 추출, 휘핑크림 짜는것 등 카페 알바에 대한 자신이 조금 있었는데, 여긴 차원이 달랐다..

기존 근무했던 곳들처럼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어 주기적으로 사장님께 라떼 심사(?)를 받았다.

 

그리고 2개월이 되어도 나아지는 게 없다며 크게 꾸지람을 받았다.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닌데, 연습을 안 한 것도 아닌데..

비는 시간이 생기면 하루에 네번이고 다섯번이고 연습했었는데...

많이 속상했지만 사장님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어서, 탓 할 것은 오직 나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에는 전공수업에 대한 회의감 + 인생에 대한 한탄으로 대2병을 겪고 있던 때였기에 자존감에 큰 스크래치가 생기는 느낌이었다.

 

나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참 많이도 생각했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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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카페 아르바이트와 같은 시기에 영어학원 보조강사 아르바이트도 했었다.

초등-중등 아이들의 단어장을 만들고 단어시험과 숙제를 매겨주는 일이었다.

초등학생 아이들은 짖궃지만 사랑스러워 같이 잡담을 하거나 하기 싫다는 것을 어떻게든 하도록 만드는 재미가 있었고, 중학생 아이들은 그 특유의 (어른들에 대한)시니컬/무덤덤한 표정으로 자기가 할일을 척척 해 와 주어서 기뻤다. 

 

일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없게 잘 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원장님의 "야구경기를 보러 가야하는데 수업이 잡혀있으니 대타를 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을 거절한 바로 다음 주에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신 나름대로 부탁의 예(?)를 갖춰 술을 사주면서 꼭 그 경기를 보고싶다는 절박함을 표현하였으나, 내가 완곡히 거절했기 때문이겠지... 허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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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베이비시터. 앞의 아르바이트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3개월 정도의 이력만을 가지고 있으나, 이 아르바이트는 9개월(근무기간만 따지자면 8개월)동안 할 수 있었다.

 

이름은 베이비시터지만, 사실 그냥 돌보미다. 초등학교 2학년인 9살 남자아이를 돌봐주는 것이 다다.

고용주인 아이 아버지 분 께서는 한부모 가정인데다 근무시간이 유동적인 만큼, 당신이 아이와 계속 같이 있어주지 못하니 그 공백을 메꾸고자 날 고용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할 일들도 아이를 좋아해 주고, 숙제를 봐 주고, 공부를 시키고, 적당히 놀아주고, 재워주고, 아침을 먹이고,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이 다였다.

 

고용주의 근무 시간표에 따라 출근과 퇴근이 새벽-아침, 오후-밤, 밤-아침의 세 가지로 나뉘어 돌아갔다.

주5일, 부담스럽지 않은 근무 시간과 양, 월급 100만원. 나름 쏠쏠했다.

 

그러나 이따금 평소보다 더 일찍 와달라거나, 출근 한 두시간 전에 안 와도 된다고 통보하거나, 지금 빨리 와달라는 등의 요구를 하셔서 이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

황금같은 주말에 데이트 하고있는데 갑자기 지금 당장 와달라고 하시면.. 당황할 수밖에 없지 않나.

못 간다고 하면 곤란하다며 언짢은 티를 내셨기에, 몇 번은 선약이 있으니 취소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연락드리겠다 하여 약속을 깨 가며 갈려고 했으나 출발 준비를 하고 있을 시점에 "고모가 돌봐준다니까 안 오셔도 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의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누그러지고 호칭 또한 "선생님"에서 "누나"로 바뀌어 감에 따라, 어린 아이를 돌본다는 나름의 책임감으로 최대한 일을 오래 하려고 했다.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와 고용주는 서로에 대해 원하던 바가 매우 극명하게 달랐고, 결국에는 고용주와 싸우고 난 뒤 아이의 겨울방학식 날을 마지막으로 그만뒀다.


2019~2020 : 치킨집, 사내카페, 에버랜드, 이월드

 

학교 앞 치킨집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비싸지 않은 가격에 치킨과 맥주를 파는 평범한 치킨집이었다.

사장님과 직원님 둘 다 요식업에 관심이 많고 나이가 많지 않은 젊은 사람들이었기에 재미있게 일했다.

 

가끔 학교 얘기도 하고, 여행 갔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하고, 학교 후배가 한다는 가게로 회식을 가기도 하는 등 일자리에 대한 만족도는 높았으나 개강 시즌 이후 줄어드는 손님과 수입으로 내 근무시간 또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5시간 일하기로 했으나 3시간만 하고 간다던가, 아예 출근하지 않는 날도 생겨나면서 지갑사정이 좋지 않아졌다. 설상가상으로 방학에는 손님이 더 없을 것 같으니 아예 쉬고 다음 학기에 보자는 말을 하시기도 했다.

 

딱 그 때 즈음 에버랜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이를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좋은 생각이라며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보라며 격려해주셨다. 그리고 종강과 함께 알바를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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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집으로 인한 수입이 너무 적어서 주말 알바를 추가로 구했다.

거의 전주 외곽에 있는 중소기업 회사의 사내 카페 아르바이트였는데, 손님이 거의 없어 정말정말 편했다.

(오픈부터 마감을 했는데, 영수증 빌지 넘버가 주로 10번대, 많아봤자 30번대였다. 한시간에 음료 한두잔 만드는 정도.)

 

출퇴근에 한시간 이상을 써야 한다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정말정말 꿀알바였다고 다시금 생각한다..

에버랜드 때문에 오래 하지 못한 게 아쉽다.

(사진은 자몽에이드. 자몽/레몬 음료는 직접 과일을 손질한 후 착즙해 음료를 만들었는데, 이따금 음료를 먹고싶으면 이렇게 만들어 먹곤 했다. 자몽 듬뿍 에이드 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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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랜드 캐스트는 상시모집이지만, 사실 캐스트들이 빠지고 들어오는 시기가 어느정도 정해져 있다.

처음엔 그걸 모른 채 서류에서 2번 3번 떨어지길래 내 이력에 문제가 있나, 내 얼굴이 문제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서류합격을 하고 면접에 가는 길, 에버랜드에 가 본 적도 없고 그저 국내 최대의 놀이공원이라는 사실과 퍼레이드, 축제 사진을 봤다는 것 만으로 그렇게 마음이 설렐 수가 없었다. 면접 합격 연락을 받고 나서는 방방 뛰었던 기억까지 있다.

 

MD를 지망했지만 우리 기수의 MD TO는 인원의 1/10 정도였고, 나는 뽑히지 못했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내 바로 앞 기수에는 MD TO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정말 운이 따라야 하나보다..)

인원 절반 이상이 F&B에 갔고 나도 그 중 하나다.

여기서 신기한 건 같은 가게에 배정받은 사람들의 인상이나 스타일이 비슷했다는 것. 적어도 내가 보기에 우리 기수는 그랬다. 스낵은 화려하고 발랄한 느낌, 양식은 우아한 느낌, 한식은 무난하고 단정한 느낌 등이다.

(쌍커풀 수술을 일찍 할 걸 그랬다...ㅜㅜ)

 

내가 배정받은 곳은 인기있는 음식점 중 하나로, 공휴일에는 가게를 둘러쌀 정도로 웨이팅이 생기는 곳이었다.

처음에 주방에 배정받았으나 하루종일 서 있어야 하는 것, 급식 아주머니 같은 옷, 뜨거운 음식을 만지는 것이 싫었다. 예쁜 옷을 입고 계속 걸어다니는 홀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매니저님께 말씀드렸고, 홀 사람 몇몇이 퇴사하면서 홀 파트에 갈 수 있었다.

 

이것이 큰 실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를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배신자, 주방이 싫어서 홀에 간 주제에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는 식의 말을 직접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일을 열심히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려 노력했다.

다른 홀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다니며 간간이 잡담을 나눌 때 나는 경보로 다니며 테이블 하나라도 더 닦으려 했다.

일의 순서를 잘 외지 못하고 손이 느린 편이기에 그를 메꾸고자 더 바삐 움직이면서 하나라도 더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외로워졌다.

또래 근무자들이 매니저님에게 종종 불려가 눈이 빨개진 채 돌아오고, 술자리에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아이를 좋아할 리는 만무했다. 내가 이렇게 절박하고 불안하니 잡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나의 안 좋은 모습을 고백하면서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부모님이나 남자친구는 몰라도 일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바라서는 안 될 것이었다. 게다가 에버랜드라는 공간 특성상 모두 성인 또래들이기에 그들의 '악의 없을', '합리적인' 피함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너무 우울한 이야기만 썼는데, 그럼에도 한번 더 에버랜드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하고싶다.

전대리의 비료 냄새, 퇴근하고 다같이 갔던 술집들, 쭈쭈닭발의 감자전과 닭발, 룸메이트들, 휴일에 강남이나 죽전 등에 가서 놀았던 기억 등 좋은 기억도 많기 때문이다.

 

일을 못한 것도, 적응을 못한 것도 결국 나이고 환경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우울하고 힘든 나날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지탱해 준 건 "에버랜드"가 갖는 공간적 의미와 퇴근길에 간간이 볼 수 있었던 퍼레이드였다.

물론 나이가 너무 많아 캐스트로 안 받아 줄 것 같지만.. ㅎㅎ 기회가 주어진다면 "환상의 나라"에 완벽히 녹아든 캐스트가 되고싶다.

나에게는 애증의 공간, 에버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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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상처를 받긴 했어도, 놀이공원이라는 공간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본가인 대구에 있는 이월드 아르바이트를 지원했고 "에버랜드" 근무 경력 덕분에 바로 뽑힐 수 있었다.

 

여기는 파트를 골라 갈 수 있었는데, MD를 하고싶다고 하니 그보단 어트랙션이 낫다고 해주셔서 어트랙션에 갔다.

그리고 어트랙션 가기 잘했다고 생각이 들었다..ㅎㅎ 판매점 자체가 크지 않아 근무자 수 또한 적고, 어트랙션 이상으로 손님을 기다려야 하는데 실내가 아닌 곳이 많아 열악해 보였다.

 

직전의 경험으로 인간관계와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던 상태였으나,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한다 했던가. 같이 일했던 근무자들 덕분에 많이 나아질 수 있었다. 그들과는 무난히 잘 지냈고, 가끔 보고싶어진다.

 

근무는 처음에는 어린 아이들 놀이기구가 있는 곳에서 일을 하다가 어린이날이 지나면서 결원이 생긴 구역으로 옮겨갔다.

주 손님(?)이 유아에서 초등학생 정도로 나이대가 올라간 건데, 어쨌든 둘 다 아가들이라 너무 귀여웠다. 재밌다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뛰어나가 입구로 뛰어오는 아가가 어떻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나.ㅎㅎ

 

코로나의 영향으로 업장 휴업, 기존 근무시간보다 단축된 근무 등 변동이 적지 않게 있었으나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계약기간을 채우고 나왔다.

사진은 퇴사 날인가 퇴사 전 날인가, 퇴근길에 찍은 하늘.

위치는 내가 근무했던 두 구역의 경계선.

 


생각보다 갤러리에 알바 관련 사진이 없어 놀랐다. 분명 이전에 알바생들 끼리 메론빙수 만들어 먹은 사진, 개인카페에서 쿠키를 왕창 넣은 프라페를 만들어 먹은 사진, 치킨집 사장님이 만들어 주셨던 치킨라면, 등등을 찍었던 기억은 있는데.. 왜 삭제한 거지. 슬프다.

 

여하튼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고, 개미 똥만큼이나마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물론 1000만원도 안 되지만 대학생인 내 신분에서 적어도 3~4개월 정도의 생활비는 충분히 되는 돈이니까,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대2병을 겪었던 시기와 에버랜드에 근무할 때에는, 내가 왜 일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있었다.

아르바이트 하나 하지 않고 용돈, 부모님 카드로 먹고 싶은 것 하고싶은 것 다 하는 주변 사람들, 옷과 먹는 것에 돈을 많이 써 월급 모은 게 없다던가 하는 말, 학생 때는 알바할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것이 효도라 말하는 주변인마저도 너무 부러웠다. 그들은 모두 여유가 있다는 거니까. 그래서 괜히 가정환경을 탓한 적도 많다.

 

그러나 결국 깨달은 것은,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환경이 다르니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말자는 것.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문구지만 나는 이를 아주 오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해가며 경험으로 깨달았다.

(물론 알면서도 마음이 따르지 않을 때는 의식적으로 되뇌고 되뇌야 한다.)

 

아르바이트는 중요한 사회경험이니 뭐니 하지만, 가능하다면 "해 보고 싶었던 일"이 아닌 이상 굳이 고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맞지 않는 일, 맞지 않는 사람과 부딪히며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