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인간실격>
6년 전 그때, 저의 가슴에 희미하고 아련한 무지개가 생겼습니다. 분명 그때만 해도 이 무지개는 연애도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무지개는 점차 색이 선명해져 저는 여태껏 한 번도 이를 놓친 적이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무지개는 소나기가 끝나면 이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지만, 제 마음에 떠 있는 무지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디 그분에게 물어봐 주세요. 그분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걸까요.
혹시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이라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사양>
우연한 계기(문호 스트레이독스라는 일본 TVA..ㅎㅎ)를 통해 다자이 오사무를 알게 된 이후, 이 두 작품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기억하기로는 인간실격만 4번, 사양만 3번 읽었네요.
그렇지만 한 회독 마다 시간을 두고 읽은 탓에 매 번 감회도 조금씩 달랐고 글의 플롯을 완벽하게 설명할 정도로 외운 것도 아니어서 항상 재밌게 읽었습니다.
인간실격은 자전적 소설이면서, 작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장편소설입니다.
그렇기에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의 생각, 세계을 이해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죠.
주인공 오바 요조는 일반인들과 다릅니다. 이 다름은 특별하다기보다는 별난 것에 가깝습니다.
어찌 보면 사회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졌기도, 불완전하고 뒤틀린 채 이루어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배고픔이라는 인간의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이 완전히 결여되어있고, 인간의 삶-편리, 효율, 효용 등을 중시하는-을 이해하지 못하며, 타인과 사회에 대한 지나친 불안과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그에게 술과 매춘부, 마약만이 돌파구가 되어주는 듯 하다 시간이 지나며 그를 극단으로 몰고가게 됩니다.
결국 그는 여러 번의 동반자살 및 자살 미수 끝에 정신병동에 갇히게 되어, 자신을 "인간 실격"으로 낙인찍습니다.
이 소설은 어둡고 음침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에 여러 번 읽었으면서도 불편하고 왠지모를 찝찝함이 남아있습니다. 글의 수위나 묘사 대상과 방법 등 많은 부분에서 다르지만,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났을때 느꼈던 불쾌함을 거의 비슷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연기', '광대짓'을 일삼으며 타인을 관찰하고 꿰뚫어보는 듯한 주인공의 시점 때문에 읽는 내내 불쾌함이 떠나질 않습니다.
그러면서 중후반부로 갈수록 캐릭터에 대한 연민이 뭉게뭉게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점점 절박해지며 미쳐가는 듯하기 때문이죠. 폐인, 잉여(쓰레기), 기둥서방으로 소위 음지인이 되어가면서.
나름의 인간을 향한 구애. 거짓말(연기, 위선)은 어쩌면 말 그대로 자신을 이방인이라 인식한 그가 할 수 있던 유일한 생존 수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기만과 허례허식이 가득한 인간세상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하다.
당연하게만 생각해왔던 것들(특히 사회)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만큼 <까다로운>것도 없다고 생각해 왔던 저였으나, 이 작품을 읽으며 여러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왜?"와 다를 바 없는 이 순수한 발언에 불쾌함을 느낀 것처럼, 요조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사회' '인간'이 바로 저임을.
왜 뒤에서는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앞에서는 웃는 얼굴로 칭찬만 할 수 있는지.
살아가면서 이런 걸 자연스레 이해하고 저 자신 또한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는 건, 마치 오래 신은 신발의 밑창이 닳는 것 처럼, 순수를 잃어가고 있다는 의미임을.
"그나저나 네 여성 편력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는 세상이 용납 못 해."
세상이라니 어떤 세상을 말하는 걸까요. 인간의 복수형을 말하는 걸까요. 대체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단 말인지.
어쨌거나 강하고 모질고 무서운 곳이라고만 생각하며 지금껏 살아온 그 세상인데, 호리키의 말을 듣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가 말하는 세상이란 건, 널 말하는 거 아니야?'
혀끝에까지 나온 이 말을, 호리키가 화라도 낼까 무서워 꾹 눌러 삼켰습니다.
'더는 세상이 용납 못 해.'
'세상이 아니라 네가 곱게 안 보는 거잖아?'
'그런 짓을 하면 세상 사람들한테 호된 꼴을 당할거야.'
'세상이 아니라 너잖아?'
'당장 세상에서 매장돼.'
'세상이 아니야. 매장하는 건 너잖아?'
그대야말로 자신의 흉포함, 괴기스러움, 악랄함, 늙은 너구리 같은 교활함, 요괴 할멈 같은 성정을 알라!
그런 온갖 말이 가슴 속을 오갔지만 저는 그저 얼굴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진땀이 다 나네, 진땀이." 하고 웃을 뿐이었습니다.
위기 쯤에 나오는 부분인데 '술 마실때만 같은 개가 될 뿐 전혀 다른 사람'인 호리키와 요조의 성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아니라 너잖아?'
작가가 호리키를 통해 '세상' '사회' '사회인' 쯤을 표현하려 했던 것 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집 안과 밖에서의 거동이 구분되어 있으며(안과 밖이 다르며), 다정한 미소로 파멸을 가져다주는 잔혹한 세상, 세상사람들.
그리고 사회를 이해하지 못했던 만큼 세상에 의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했던 요조.
요조에게 제일 큰 평화와 좌절을 안겨 주었던 건 다름아닌 호리키의 미소였습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요조에게 나타난 구원이 동시에 그의 고뇌, 즉 정신병동에 처넣어버리게 되는 것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
삶의 희망이자 빛 쯤으로 여겨지던 요시코의 순수한 신뢰가 더럽혀지며 요조의 마음 한 구석이 붕괴되어 버리는 건, 그가 아직도 순수를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순수와 다른 성질의 순수, 요시코의 무조건적 신뢰를 동경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순수는 쉽사리 금이 가고 말았으며 이에 절망한 요조는 모든 것에 체념해버리곤 묻습니다.
'신뢰는 죄가 되나요?'
사양은 다자이의 페미니즘적 성향이 잘 드러나있는 소설입니다.
자신이 원하는것을 당당하게 용기내어 말할 수 있는 멋진 '여성', 카즈코가 주인공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카즈코의 바람은 그 글의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적 배경을 고려하면 매우 진보적이며 앞서있습니다.
사회의 평판(꼬리표) 같은 것들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며(꼬리표가 달리지 않은 사람이야 말로 불량한 것), 당신의 아이를 낳고싶다는 얘기를 큰 거리낌 없이 얘기합니다.
이런 그녀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며 원하는 방식의 삶과 행복을 위해 자신만의 투쟁을 계속해나가리라 다짐합니다.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가야 할 곳이 있어."
"뭐야, 예전에 들었던 그 이야기야? 결국 그 노인과 결혼하기로 한 거야?"
"아니야."
"그렇다면 뭐, 독립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돈을 벌겠다고? 아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말도 아니야. 나는…… 혁명을 할 거야."
전투, 개시.
언제까지 비탄에 저저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나에게는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꼭 이루어 내야 할 것이 있었다.
…
전투, 개시.
사랑한다. 진심으로 좋아한다. 열렬히 사모한다. 정말로 사랑한다. 진심으로 사모한다.
사랑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좋아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모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양의 시대적 배경인 2차 세계대전 전후, 다자이가 글을 썼다는 1947년의 '일본' 에서 어떻게 이런 특징의 캐릭터를 구상해 낼 수 있었을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여성운동은 참정권, 사회제도에의 접근기회 확보를 주장했을 뿐 그 이상의 여권운동은 1960년대 이후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허무주의에 빠져 비탄에 잠긴 하루하루를 이어나갈 때 카즈코는 미래의 꿈을 꾸며 자신의 소망을 성취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을 말하는 캐릭터로 여성 특히 몰락해가는 귀족 가문의 딸을 설정한 것으로 보아 작품의 제목인 사양(저물어 가는 해)은 구시대의 일본과 그들의 낡은 사고방식, 도덕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해가 진 뒤에 반드시 찾아올 달(밤과 새벽), 또 다른 해는 아마 카즈코와 그의 아이의 밝은 미래를 암시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삶의 투쟁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습니다.
아, 이 사람은 분명 뭔가 잘못되어 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려는 것처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면 이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모습을 미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 살아 간다는 것. 아, 그것은 이토록 지난하고 괴로운 대과업인 것인가.
우에하라의 생활방식을 보고 카즈코가 탄식하는 대목입니다.
1만 엔이면 전구가 몇개일까 생각하는 카즈코가 안쓰럽게 생각되면서도 동시에 우에하라와 극단에 있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부분에서 작가의 생각이 녹아든 듯 합니다.
인간실격의 요조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삶이라는 괴로움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그른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위만으로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매춘부와 술, 마약에 찌든 삶을 살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생존을 이어나가기 위함이었기에 자신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카즈코의 동생 나오지가 보이기도 합니다.
후에 나오는 나오지의 유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나오지 또한 다자이가 투영된 인물입니다. 물론 우에하라 또한 일부 그렇지요.
고뇌가 불러온 퇴폐적인 유흥. 살아있는 게 서글퍼서 술을 마시고, 귀족의 탈을 벗고 싶어서 타락하려 애를 쓰는 모습 등등.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던 사양의 의미에 관해서,
카즈코와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 멋대로 사는 애'쯤으로 보이곤 했던 나오지의 "자신은 귀족"이라던 발언을 연관시키고 싶습니다.
귀족으로 죽은 어머니와 나오지를 저문 해로 해석하고 귀족이라는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혁명을 이룩한 카즈코와 그 아이를 (후에 떠오를)빛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오지 또한 카즈코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이루어져선 안 될 사랑을 꿈꾸었으나, 결정적으로 그는 두려움때문에 삶을 끊어낸 반면
카즈코는 죄의식 따위보다 자신의 혁명을 이룩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게 두 인물 간의 결정적인 차이로,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견해차이로, 작용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이 나를 잊으셔도, 혹은 당신이 술때문에 기어이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저는 이제 오롯이 저의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 꿋꿋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게 이런 강인함을 준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제 가슴의 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것도 당신입니다.
제게 살아야 할 목표를 가르쳐준 사람 또한 바로 당신입니다.
사생아와 그 아이의 어머니.
하지만 우리는 구시대의 도덕과 끝까지 투쟁하며, 태양처럼 뜨거운 삶을 살아 갈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당신도, 당신 나름의 투쟁을 계속해주세요.
카즈코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구시대의 도덕과 어긋난다는 걸. 하지만 그녀는 투쟁하는 삶이야 말로 뜨겁고 아름다운 것이란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사양을 읽을때면 항상 의연한 마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무엇이든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다면 이 세상의 관념 따위 다 이겨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듭니다.
아마 이렇게 혁명적인, 계몽적인 주인공에게 충분히 이입해가며 읽었다는 뜻이겠죠.
적어도 저에게 카즈코는 정말 존경스럽고 멋있는 여성입니다. 부디 카즈코와 같은 인물이 있다면 그 분의 앞길은 꽃길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다.
人間は恋と革命のために生まれてきたのだ。
<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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