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말 놔두고 나쁜 말 쓰지 말아요. "
왓챠를 꽤 오랫동안 써왔지만 왓챠 익스클루시브 작품을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키딩의 포스터와 간략한 설명을 보고 나서부터 키딩을 볼 수 있게 될 날을 고대했고, 시간이 나게 된 직후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 사고로 아들을 잃었지만 인형과 함께 웃어야만 하는 유명 어린이 프로그램의 진행자 제프.
자신의 고통을 직면하고 나누지 못하는 그의 삶에 비틀린 슬픔과 광기가 깃들기 시작한다. -
작품 자체가 밝으면서도 어둡습니다.
제프의 방송과 관련된 부분은 아이들 방송이니 만큼 행복하게 밝게 명랑하게 진행되지만, 그와 별개의 세상인 제프의 가족들은 마냥 밝지도 행복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강압적인 방송 책임자인 아버지 덕분에 그의 우울, 분노 같은 것들은 갈 곳을 잃습니다. 마음 터놓고 얘기할 만한 상대가 없던 그는, 방송에서도 표현을 억압받은 채 '미스터 피클스와 제프리 피키릴로는 별개의 인물'이며 '피클스 아저씨는 제프와 다르게 아프지도 않고 슬픈 일도 없었다'라고 합니다.
이쯤에서 어떻게 힘들어하는 아들이자 자신이 총괄하는 프로그램의 주인공한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매우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프 또한 아들 필이나 윌에게 비슷한 류의 언어폭력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암시해줍니다. 너무나 현실적이면서도 잔인하죠. 폭력의 피해자가 훗날의 가해자가 되는 마법.
You can feel anything at all, anything at all, You can feel it.
Happy, sad, big or very small, anything at all is fine.
It's you who is doing the feeling, and that makes it okay.
너는 무엇이든 느낄 수 있어, 행복도 슬픔도, 크던 작던, 네가 느끼는 감정이니까 괜찮아.
어쩌면 피클스 아저씨가 가장 필요로 했던 말이 아닐까요. 자기 자신, 아버지, 등등에게서 있는 그대로의 제프리 피키릴로로서 존중받는 것.
교육적이고 올바른 것을 이야기하고 노래부르면서 정작 본인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가두었던 제프가 가여울 뿐입니다.
"FUCK YOU!"
저 썅X.. 치료에 차도가 있다고 바로 버리고 지 혼자 떠나겠다고 하는 꼴 진짜 같잖았습니다.. 후
황당해 하는 제프가 이해한다며 쓴웃음을 짓고 머지않아 아버지의 법규를 시작으로 온 가족이 비비언을 향해 욕을 퍼붓습니다. 어이없고 화나는 상황 속에서도 '이해한다'며 '한 여자가 삶을 더 살 수 있게 된 것'이라 말하는 우리 고구마 답답이 제프 대신 주변의 가족들이 그의 감정을 대변해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만난 시한부 여자는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듯했으나 끝내는 상처를 헤집어 더 크고 아픈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분명히 그녀의 인생에는 잘 된 일이고, 나는 그녀를 사랑했는데 지금 왜 이렇게 분노하고 있냐며 자신의 감정조차 올바른 방향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되는 건 덤입니다.
일본에 있다는 킨츠기(Kintsugi) 기법은 깨진 도자기 따위를 다시 붙여 아름답게 새로 만들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깨졌다는 것은 힐링의 시작이며, 깨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다시 고쳐 만들 수 있다고 사람의 상처를 은유로 표현하는데 저는 다소 비약일 수 있습니다만,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게 이 화에 다 몰려있는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제프는 분노나 상실감 같은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피클스 아저씨는 이래선 안 된다' '좋은 말만 해야 해'같은 뉘앙스의 자기 부정, 자기 억압을 보여줍니다. 그냥 다 표현해 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텐데, 억누르고 억누르다 결국 혼자서 표출하거나 이상하게 터져버리는 식입니다. 깨어져버린 것은 다시 붙이는 작업이 필요한데도 손이나 테이프 따위의 임시방편으로 괜찮아질 거라고 믿는 격이죠. 상처와 그로 인한 감정들을 인지하고 그 근원부터 힐링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를 빗댄 게 킨츠기라 생각합니다.
이는 이후의 에피소드에서 "소중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 봐"라는 대사로 이어집니다.
일과 가족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하나는 가짜고 하나는 진짜"라며 일에 가족을 끌어들이고, '피클스 아저씨'보다 질의 남편이자 윌과 필의 아버지인 '제프리 피키릴로'를 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제프에게서 결국 그는 계속 자신을 괴롭히던 '피클스 아저씨는 이런 캐릭터'라는 굴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원망하지 않냐며 그렇다고 말하라는 질의 다그침에 못해, 아니야를 반복하던 제프가 "I do, I blame you" 를 말한 그 순간 이미 남편으로서, TV 속이 아닌 현실에 사는 제프를 보여줌으로써 어긋나 있던 질과의 관계에서 개선의 여지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작품 내내 질은 '피클스 아저씨의 아내로 사는 것'에 대한 염증을 나타냅니다. 왜 윌이 asshole이 되어선 안 되고, 왜 우리 아들을 죽인 트럭기사에게 생활비와 핸드폰 요금까지 주는지, 자기는 남자 친구와 잘 지내는데 왜 제프는 여자 친구를 만들고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지 등등 셀 수도 없을 만큼 제프에게 답답함을 느껴왔습니다. 제프는 자신과 피클스 아저씨를 동화시키려고 노력해온 것처럼 보입니다만, 결국 피클스 아저씨는 TV 속의 캐릭터일 뿐, 현실을 사는 제프와는 다른 인물임을 인정하고 현실세계의 자신에게 집중하는 순간 가족 구성원으로서 제프의 힐링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디디에게 다소 용감한 결정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매디의 양육권 전체를 스캇에게 양도하는 대신 인형들을 모두 되찾아온 거죠. 디디에겐 가족보다는 자신의 피, 땀, 추억이 서려있는 캐릭터들이 더 소중했으니까요. 이후 뇌졸중으로 쓰러져 있는 아버지에게 가서 말합니다. 자신이 해냈다고, 원래대로 돌려놓았다고.
그녀의 힐링은 모든것이 망쳐진 상황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수습하는 데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이후 시상식 편에서 질의 발언으로 더 확실해지는데, 아버지나 동생을 원망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던 디디에게 "본인 무덤을 판 건 디어드러라고요. 결혼한 것도 본인, 일을 선택한 것도 본인..." 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날카로운 조언을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병이고, 상상은 약이에요."
상상이라는 약으로 현실이라는 병을 고칠 수 있다면,
상상을 만들고 도와주는 것 또한 기만행위가 아니라 힐링을 도와주는 것일 뿐.
대부분의 씬이 좋았지만, 저는 유독 양로원 씬이 제일 좋았습니다. 도피를 위해 택한 곳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그녀와 얘기하게 되면서, 제프에게 큰 상처로 남아있는 어머니의 도피가 더 이상 제프를 아프게 할 수 없게 됨과 동시에 그가 당시의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프 또한 어머니의 말처럼, 아이들은 사랑스럽지만 가끔씩 자신을 옥죄는 느낌에 도망가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저 또한 몽상을 즐겨하는데, 시작하지도 않았으면서 이미 그 일을 끝낸 저 자신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제가 뭐라도 된 듯한 자신감 비슷한 것도 생기고, 심지어 자기효능감도 어느 정도 느끼게 되죠. 조금 이상한 소리 같긴 하지만, 저처럼 게으르고 동기가 부족한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한 자신을 상상하며 일을 계속하는 것이 성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윌의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은 마지막 화에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필의 사고 이후 일그러지기 시작했던 피키릴로 가족을 되돌린 건 다름 아닌 일그러짐의 시발점이었던 필의 심장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곁에서 없어진 줄 알았던, 그래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필이 다른 일곱 아이들의 몸 속에서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됨으로써 상처는 그 시발점에서부터 출발하여 힐링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습니다.
+)
이야기 자체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캐릭터들과 이를 연기한 배우들까지 모두 잊기 힘들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디어드러의 남편 스캇을 보면서 실리콘 밸리의 '그 캐릭터'(개빈의 사이비 정신적 지주)와 정말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동일 배우였습니다..ㅋㅋㅋㅋㅋㅋ)
특히 짐캐리의 연기와 공드리의 연출에 어느 정도 홀려버려서, 추후에도 이 둘의 작품을 찾아볼 것 같습니다.
소재부터 영상미,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 촬영기법이나 진행방법 등등 모든 것이 좋았던 드라마입니다. 비록 유쾌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몰입도나 전개가 너무 좋아서 다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고 아파도 감수하면서 볼 가치가 충분했습니다.
왓챠를 사용하고 계시고, 다소 어둡더라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한 드라마를 보고 싶으시다면 키딩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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